사람들의 목소리보다 셔터 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북촌 계동 골목길 한가운데에 나성숙 씨의 한옥 ‘봉산재’가 있다. 쟁반·소반·수저·혼수함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빛깔 좋은 햇살이 드는 방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담소를 나누는 관광 명소 같은 집. ‘ㅁ’ 자 형태의 한옥 툇마루에 앉으니 지붕에 앉은 기와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그는 이곳, 북촌한옥마을을 화폭에 담았다. 붉은 밭 위에 겹겹이 쌓인 기왓장이 파도처럼 넘실대고 오색 빛 고운 진주가 기와 위에 눈처럼 달처럼 내려앉는다. 나무 위에 북촌을 담고 달빛을 심고 꽃을 피우고 옻칠로 반들반들 빛을 넣었다.
“처음 옻칠을 시작하면 3년은 사포를 치는 노력과 시간이 따라야 그 멋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수십 번의 고된 공정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지요. 나무 위에 생칠로 초칠을 하고 나무가 뒤틀어지지 않도록 쌀풀과 생칠을 섞어 삼베를 붙인 다음 사포질을 하고, 다시 흙과 옻칠을 섞은 골회를 바르고….” 열일곱 번에 가까운 공정 과정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복잡하다. 그야말로 노동에 가까운 고된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골회의 양을 줄여 삼베의 질감을 강조하고, 어느 한 단계를 가감加減하기도 하면서 그만의 방식으로 더 깊고 넓게 작품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인내와 우직함으로 완성한 평면 작품 30여 점과 혼수함 10점을 모아 60세 기념전을 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가 한옥에 입주한 2007년부터 2012년 봄까지 약 6년간 제작한 작품이다. 피란 시절에 태어난 그에게 한옥은 늘 고향이다. 그가 만드는 이야기의 축이 한옥이라는 점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한옥에서 태어났고, 지금 사는 이 한옥에서 죽겠지요. 아침에 눈뜨고 밤에 잠들 때까지 한옥의 지붕 속에 살고 있고요.” 한옥과 더불어 그의 작품 소재가 되는 것은 민화다. “한옥에는 항상 민화가 함께 있었습니다. 다락방을 올라가는 문짝에도 그리고, 병풍에 그려 시집가는 딸의 혼수로 보내기도 했지요. 서민의 일상에서 나온 소박한 그림에서 늘 작품의 영감을 얻습니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깝게 밀착해온 세계이기 때문이죠.”
전통은 달라진다 옻칠 작업의 시작은 우연하게 찾아왔다. 2006년 황망하게 남편을 잃고 주저앉을 것만 같은 고통에 휩싸였다. 남편의 상실로 얻은 슬픔보다 이후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큰 괴로움으로 몰려왔다. 당시 서울대 은사인 양성춘 선생이 “손재주가 좋으니 전통을 배워라”며 소목 작업을 추천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갤러리 라메르에서 가진 옻칠 예술가 전용복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옻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 그가 말하는 옻칠의 매력은 무엇일까? “옻칠의 검은빛을 들여다본 적 있나요? 일반 검은색과는 다릅니다. 깊이가 모호한 우주의 공간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칠흑 같은 검은빛, 생옻칠을 바르면 고목의 껍질처럼 깊은 갈색빛을 냅니다.” 짙고 묵직한 에너지가 있는 자연 본연의 색이다.
그는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다. “서양 디자인을 하는 여자가 전통을 알까?” 이른바 ‘선생님’들의 날 선 호통이 들렸고, 부정적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전통관은 명확하다. “이와야마 칠예미술관의 전용복 선생과 장인 손대현 선생에게서 옻칠을 배웠습니다.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전통이 미래다’라는 생각을 다시금 명확히 한 시간이었죠. 한국과 중국, 일본의 옻칠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전통은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통을 계승하려면 시장이 확장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인이 남달라야 합니다. 그것이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60세를 맞아 준비하는 그의 세 번째 개인전은 옻칠 작업으로 자신을 담금질하며 살아온 6년의 시간을 함축한 역사다. 그가 주로 작업하는 칠흑 같은 밤에 조용히 앉아 사포질하면 상념은 사라고 움직임만 남는다. 그가 남편 작고 후 삶의 경계에서 시작한 옻칠. 그는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와 만든 작품들이 바라 보는 전시품이 아닌 손때 묻고 부대끼며 함께 사는 일상의 한 부분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