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아트센터

나성숙 작품
인사말북촌한옥마을오시는 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5000년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우리는 ‘문화의 시대’에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문화를 찾아내고 익히며 문화산업으로 발전시켜 그 부가가치를 창출해 나가는 적극적인 전략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저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며 교육계에서 30여년을 보냈습니다.
여러 단체를 운영하고 국제적인 활동을 하면서 익힌 경험을 이제 우리 전통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의 전통은 제 마음을 움직였고 우리 것을 가지고 있다는 자긍심, 생활 속에 녹아있는 해학과 여유, 넉넉하고 따뜻하며 깊이 있는 격조와 기품도 있었습니다.

알리고 싶습니다.
가르치고 싶습니다.
익히고 싶습니다.
더욱 즐기고 싶습니다.

앞으로 북촌아트센터는 전 분야의 한국전통으로 이어질 것이며 문화예술인 뿐만이 아니라 사회지도층의 인식 변화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한국전통을 사랑하는 문화인의 정감어린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감사합니다.

북촌아트센터 이사장

북촌이란?

북촌지역은 예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 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조선왕조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조선성리학에 기초하여 배치된 궁궐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뛰어난 자연경치를 배경으로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하여 전통 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00년 역사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원서동,재동,계동,가회동,인사동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 으로 불리었으며, 당시로서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 곳곳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이 지역은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잘게 나뉘어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 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도심주거형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개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근대화 시기의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들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 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전의 대형한옥이 고급자재와 전문 목수(도목)에 의해 설계, 시공되 고 건물의 배치가 성글게 놓여진데 비해 이 시기에 지어진 도심 한옥군은 필요에 의해 대규모로 생산 되었으며, 중정을 갖는 전통배치를 유지하면서도 좁은 공간 속에서 최대한의 공간활용을 하는 방식 으로 설계되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들이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움 만큼 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서구의 네모 반듯한 도로가 아니라 마치 물이 흘러 내려가듯 가지에 가지를 치는 도로체계는 이 지역의 오랜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인사동길은 원래 청계천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형성되었으며, 삼청동과 가회동의 길 또한 북한산의 지류를 따라 형성되었다.
때론 지나는 이웃의 어깨가 닿을 듯한 폭에서 옛 우마가 지날 듯한 골목은 미로처럼 연결되어있으며, 좁아졌다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곤 하는 골목의 연결을 따라 옛 한옥들이 맞닿아 있는 풍경은 이 지역 의 맛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서울에서의 최상지는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니 이 궁궐을 연결하는 선상의 지역, 북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서 현 율곡로 좌우측 일대는 주거입지 즉, 양기풍수상(陽氣風水上)의 최길지(最吉地)였으며, 이 지역은 이른바 북고남저(北高南低)로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될 뿐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였으며, 안산(案山)인 남산의 전망도 좋아 정침(正寢) 이나 사랑(斜廊)이 항상 남면(南面)할 수 있는 장점도 지녀 이 일대에 그때마다의 권문세가(權門勢家) 들이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곳에 집거함으로써 자기들끼리의 대면을 통한 정보 교환이 가능했으며 그들의 지배를 언 제나 합리화하고 장기화하기 위한 유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물론 그 내부에 있어서는 오히려 분 파활동(分派活動)을 활발하게 하는 요인도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서울에 있는 북촌(北村)의 형성 과정이다.한편 당대의 권문세가가 아닌 하급관리들이라든가 양반의 자손이기는 하나 현직의 고급관 인이 아닌 자들은 남산 기슭인 이른바 남촌(南村)에 살았다. 그곳은 음지(陰地)이기는 하나 배수가 잘 되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취수에 편리했으니 오늘날의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으로, 『매천야록(梅川野錄)』권1 상에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老論)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少論)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泉野錄)』권1 상은 고종 원년(1864)에서 동 24년(1887)의 일을 두루 적었는데 이 당시 북촌에는 노론만이 거주하였고 소론과 남인 북인은 설령 고급관인일지라도 남촌에 섞여 살았다고 한다.